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메네스 왕조 (문단 편집) == 관용 정책 == [[만화]], [[300(영화)|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는 관대하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했던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이나 바빌론 제10왕조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원래 페르시아가 들어서기 이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정복 직후 피정복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시리아가 이런 정책을 썼는데,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아예 뿔뿔히 흩어지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이 전통을 깨고 원주민들이 제 고향에 그대로 살도록 놔두었다. 피정복민들이 그대로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거나 민심이 뒤숭숭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페르시아는 폭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아시리아보다 훨씬 오래동안 안정적인 전성기를 누렸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이 나름 효과를 보았다는 뜻이다. 페르시아는 기존의 토후들에게 [[사트라프]]의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민심을 달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간혹 가다가 사트라프가 반란을 일으켜도 국가 전복 기도나 독립 시도 수준의 악질이 아닌 이상은[* 어차피 사트라프들도 그 정도의 음모를 꾸몄다가는 금방 진압당하고 처형당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트라프의 반란은 보통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에 가까웠다.] 중앙군을 동원해서 진압하기보다는 사절을 보내서 말로 구슬리는 것을 선호했다. 샤한샤 입장에선 군대를 동원해서 밟아놓는 것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서로 피곤할 일이 없을뿐더러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는 것에 비해 반란 재발의 위험도 낮았다. 물론 반란을 일으켜도 한두 번은 눈감아주는 관대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이러한 관대한 이민족 정책[* 특히 피지배 민족의 [[종교]]적 자유 같은 면]과 잘 짜인 법령 체제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과 존속의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관용 정책의 다른 예시로 제국의 공용어 설정이 있는데, 기존 이란인들의 페르시아어가 아닌 (인구가 많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를 채택한 것이다. 물론 공문서나 종교 문서에서는 페르시아어가 병기되곤 했다. 페르시아는 아람어나 페르시아어를 딱히 피정복민들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기존의 언어를 그대로 쓰도록 허락했다. 덕분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는 이집트어, 페니키아어, 유대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그대로 쓰였다. 심지어 필요할 때는 최대 적국이었던 [[고전 그리스어]]도 공문서에 쓰기도 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 중장보병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리우스 3세 시절에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 군대에 포함된 그리스인 병사들보다 페르시아 군대에 포함된 그리스인 [[용병]]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다만 가끔씩은 언어가 워낙 많아서 군대 내에서 지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분야는 바로 종교 분야였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지만 모든 황제들이 신민들을 조로아스터교로 강제 개종시키거나 기존의 사원을 허무는 등 탄압하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들었다. 가장 역사가 깊은 이집트의 경우 오히려 기존의 신전을 확장, 개축하는 데에 국고를 지원해주기까지 했고, 황제를 [[아문]]의 아들로 묘사하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바빌론 유수|바빌론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을 제 땅인 가나안으로 되돌려보내 준 것도 바로 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였던 [[키루스 2세]]였다. 뿐만 아니라 키루스 2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 국고를 들여 지원했고, 덕분에 그 외골수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이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여기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키루스 2세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얼마나 당시 기준으로 관대한 포용 정책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키루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그에 비하면 훨씬 배타적인 종교 정책을 피면서 유대인과 페르시아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된다.]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제국)였던 [[아시리아]]는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타민족들의 분노를 사서 멸망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용을 중시해서 다양한 민족들의 포섭에 성공했기에 아시리아보다 오래 갔다. 그래서 후에 등장한 다민족 국가들의 성공적인 롤 모델로 평가되며, 아랍 지방과 동방 제국의 기본적인 틀을 닦을 수 있었다. 서양의 보편 제국으로서 [[로마 제국]]이 있다면 동양의 보편 제국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꼽을 정도이다.[* 페르시아는 내부 반란보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알렉산드로스만 아니었으면 몇백 년은 더 지속될 국가였다. 당장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한테 작살나는 그 순간까지도 돈은 엄청 많았다.] 페르시아의 역대 황제들이 모두 [[고전 이집트어|이집트어]], [[산스크리트어]], [[페니키아어]]로 따로 왕명을 지어 부르게 했다는 사실[* 예를 들어 [[다리우스 대제]]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다라야-바후스였다.]은 황제들 역시 다민족 포용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마지막 황제인 [[다리우스 3세]]는 망명해 온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그리스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도 알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